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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 충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가 아니면 누가 우리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2024년 1월 1일 월요일)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새해의 시작을 밝혀 줍니다. “때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시어 보내셨습니다”(갈라 4,4). “때가 찼을 때(pienezza del tempo)”라는 표현이 인상 깊습니다. 고대에는 암포라(anfore)를 비우고 채우면서 시간을 측정했습니다. 암포라가 비워지면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고, 가득 차면 그 시간이 끝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때가 찼을 때입니다. 역사의 암포라가 가득 찼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넘쳐흐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그것도 한 여인, 곧 마리아를 통해 그렇게 하십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입니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과 세대가 “한 방울 한 방울(goccia dopo goccia)”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을 준비하며 도달한 지점입니다. 이처럼 성모님은 시간의 심장부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당신의 역사를 한 여인(donna)을 통해 전환시키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성경은 우리를 창세기라는 기원으로 되돌려 보내며, 아기를 안고 계신 성모님께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함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간의 시작에는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새해를 성모님을 부르며 시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옛날 에페소에서 그랬듯이 – 그 그리스도인들은 용감했습니다! – 신실한 백성이 기쁘게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를 선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Madre di Dio)라는 말은 사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사랑스러운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간성과 영원히(per sempre) 결합하시어, 인간성이 더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 되었다는 기쁜 확신을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주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영원한 계약을 고백하는 몇 마디 말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이것은 신앙의 교리(dogma di fede)일 뿐 아니라, “희망의 교리(dogma di speranza)”이기도 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인간이 하느님 안에 영원히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때가 찼을 때,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시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성 바오로의 본문은 두 번째 보내심을 덧붙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시어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게 하셨습니다”(갈라 4,6). 그리고 성령을 보내시는 일에도 성모님은 주인공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주님 탄생 예고(Annunciazione) 때부터 마리아에게 머무르기 시작하셨고(루카 1,35 참조), 이어서 초대 교회 때에는 “마리아와 함께(con Maria, la Madre)”(사도 1,14) 기도에 전념하던 사도들에게 내리셨습니다. 이처럼 마리아를 받아들임은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녀는 “위엄의 주님을 우리의 형제로 만드셨고(reso nostro fratello il Signore della maestà)”(첼라노의 토마스, 『제2 전기(Vita seconda)』, CL, 198: FF 786)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아빠, 아빠!” 하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의 모성(maternità)은 하느님의 자애로운 부성(paterna)을 만나는 가장 가깝고, 가장 직접적이며, 가장 쉬운 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곧 가까이 계심(vicinanza), 연민(compassione), 자애로움(tenerezza)입니다. 사실 성모님은 우리를 믿음의 시작과 중심으로 이끄시는데, 믿음은 이론이나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이자 아버지 사랑의 거처로 만들어 주는 거대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 성모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신심의 선택이 아니라, 신앙의 요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마리아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성 바오로 6세, 『칼리아리 강론(Omelia a Cagliari)』, 1970년 4월 24일)

교회는 자신의 여성적 얼굴을 재발견하기 위해 마리아가 필요합니다. 곧 여성으로서, 동정녀로서, 어머니로서 교회의 완벽한 모범이자 표상(Lumen gentium, 63 참조)이 되시는 성모님을 더 닮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여성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돌봄과 배려, 인내와 모성적 용기로 이루어진 사목을 통해 풍요로워지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세상 역시 평화를 찾고, 폭력과 증오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시선과 볼 줄 아는 마음을 되찾기 위해 어머니와 여성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회는 여성이라는 선물, 곧 모든 여성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보호하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한 여성을 해치는 것은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인(donna)이신 마리아께서는 때가 찼을 때 결정적이었듯이, 모든 이의 삶에도 결정적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보다 더 자녀들의 때와 긴급한 필요를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징인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또다시 “시작(inizio)”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곳에서 포도주가 모자란 것을 알아차리고 예수님께 말씀드린 분은 바로 마리아였습니다(요한 2,3 참조). 자녀들의 필요가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움직여 예수님께서 개입하시도록 재촉한 것입니다. 그리고 카나에서 예수님께서는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라. 그들은 아귀까지 채웠다”(요한 2,7)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마리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도 은총이 넘쳐흐르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충만함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채워져야 할 부족함과 고독, 공허함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습니다. 충만함의 어머니(Madre della pienezza)이신 마리아 외에 누가 그것들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스스로에게 갇히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성모님께 갑시다. 삶의 엉킨 매듭을 풀 수 없을 때, 성모님께 피신처를 찾읍시다. 평화가 없는 우리의 시대는 인간 가족을 다시 하나로 묶어 줄 어머니를 필요로 합니다. 일치의 건설자가 되기 위해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자녀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창조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합시다. 곧 그들을 모으고 위로하며, 그들의 고통을 듣고 눈물을 닦아주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젖을 먹이는 동정녀(Virgo lactans)의 사랑스러운 성화(聖畫)를 바라봅시다. (몬테베르지네 수도원의) 어머니는 이런 모습입니다. 얼마나 자애롭게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가까이 계시는지요.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새해를 하느님의 어머니께 맡겨 드립시다. 우리의 삶을 성모님께 봉헌합시다. 성모님께서는 자애롭게 우리의 삶의 충만함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것이며, 예수님은 시간의 충만함, 모든 시간의 충만함, 우리의 시간의 충만함, 우리 각자의 시간의 충만함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록된 대로 “때가 찼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보내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드님을 보내심으로써 때가 충만하게 되었다.”(마르틴 루터, 『갈라티아서 강해(Vorlesung über den Galaterbrief)』 1516-1517, 18 참조) 형제자매 여러분, 올 한 해가 주님의 위로로 가득하길 바랍니다. 올 한 해가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모성적 자애로움으로 충만하길 바랍니다.

이제 모두 함께 세 번 외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함께: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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