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자매 여러분,
이 성찬례(Eucaristia)를 여러분과 함께 거행하게 되어 기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 본당 공동체, 사제단, 교구장 주교님, 그리고 민간 및 군 당국자 여러분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방금 들은 이번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비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착한 사마리아인(Samaritan)의 비유(루카 10,25-37)를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도전하며, 우리의 삶에 질문을 던지고, 잠들었거나 산만한 우리의 양심의 평온을 흔들며, 율법의 외적 준수에만 안주하여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viscere compassionevoli)으로 느끼고 행동할 수 없는 편안한 믿음의 위험에 맞서게 합니다.
사실 연민(compassion)은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복음서 이야기에서 연민이 사마리아인의 행동으로 묘사되지만, 이 구절이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시선(sguardo)입니다. 실제로 강도들을 만나 길가에 쓰러져 있는 상처 입은 사람 앞에서 사제와 레위인에 대해서는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32절)고 말합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에 대해서는 복음서가 “그를 보고 가엽은 마음(ebbe compassione)이 들었다”(33절)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시선이 차이를 만듭니다. 시선은 우리가 마음속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고, 볼 수 있고 연민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외적이고 산만하며 성급한 시선, 즉 못 본 척하는 시선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감동시키거나 상황에 대해 질문하게 하지 않는 시선입니다. 반면에 마음의 눈으로 보는 시선, 더 깊은 시선, 다른 사람의 상황 속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하고, 내적으로 참여하게 하며, 우리를 감동시키고, 흔들고, 우리의 삶과 책임을 질문하게 하는 공감(empatia)의 시선이 있습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선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시선입니다. 우리도 서로를 향해 하느님과 같은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눈을 갖도록 배우기 위함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영원하신 아드님께서 인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감동과 연민의 눈과 마음과 마음(viscere)으로 바라보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분을 역사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던 복음 속 그 사람처럼, 인류는 죽음의 심연으로 내려갔고, 오늘날에도 종종 악의 어둠, 고통, 가난, 죽음의 부조리와 씨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연민으로 바라보셨고, 우리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셨으며, 우리 가운데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당신 사랑과 자비의 기름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며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러 오셨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하느님께서 자비와 연민이심을 여러 번 상기시켜 주셨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향한 아버지의 연민이시다”(2019년 7월 14일 삼종기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신 착한 사마리아인이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Agostino)는 “그분은 스스로를 우리의 이웃이라고 부르기를 원하셨다.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도들에게 심하게 맞고 버려져 길가에 쓰러져 있던 반쯤 죽은 사람을 도우신 분이 바로 당신 자신임을 이해시킨다”(그리스도교 교리, I, 30.33)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가 우리 각자에게도 도전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비로운 하느님의 현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그분의 제자로서 따르는 것은 우리도 그분과 같은 감정, 즉 감동하는 마음,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 시선, 상처를 돕고 치유하는 두 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짐을 짊어지는 강한 어깨를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세의 말을 들려주며,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분께 돌아가는 것이 외적인 행위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곳에 하느님께서 사랑의 율법을 쓰셨음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의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신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도록 이끌리게 될 것이며, 그분처럼 연민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치유받고 사랑받음으로써 우리도 세상에서 그분의 사랑과 연민의 표징이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이러한 사랑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해수면 아래에 위치한 도시인 예리코로 내려가는 그 길은 악과 고통과 가난에 잠겨 있는 모든 이들이 걷는 길입니다. 어려움에 시달리거나 삶의 상황에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의 길입니다. 길을 잃고 바닥을 치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든 이들의 길입니다. 그리고 억압적인 정치 체제, 가난을 강요하는 경제, 꿈과 삶을 앗아가는 전쟁의 희생자가 되어 옷을 벗기고, 강도질당하고, 약탈당한 많은 민족들의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보고 그냥 지나쳐 버립니까, 아니면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의 마음이 꿰뚫리도록 내버려 둡니까? 때로는 단지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국적이나 종교를 가진 사람만을 우리의 이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관점을 뒤집어 놓으시며, 상처 입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인, 즉 이방인이자 이단자를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은 – 베네딕토 16세(Benedetto XVI)께서 쓰셨듯이 – “연대 의무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어떤 공로가 필요한지 묻지 않습니다.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그의 마음이 찢어집니다 […]. 만약 질문이 ‘사마리아인도 나의 이웃인가?’였다면, 주어진 상황에서는 분명한 ‘아니요’라는 대답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뒤집으십니다. 사마리아인, 즉 이방인이 스스로 이웃이 되어 나에게 보여줍니다. 나는 내면으로부터 이웃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미 내 안에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사랑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필요 앞에서 마음이 열려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자렛 예수, 234).
그냥 지나치지 않고 보는 것, 바쁜 걸음을 멈추는 것,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삶, 그의 필요와 고통이 나의 마음을 찢도록 내버려 두는 것. 이것이 우리를 서로의 이웃으로 만들고, 진정한 형제애를 낳으며, 벽과 울타리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이 자리를 잡고, 악과 죽음보다 강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착한 사마리아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 각자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도 다시 들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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